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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것처럼 알아보니

고가(高價) 전기차에 대한 단상

올해부터 전기차 구매 보조금이 차량 가격 기준으로 차등 지원됩니다.

1월 21일 환경부 자료에 따르면 "전기차 가격인하를 유도하고, 대중적인 보급형 모델의 육성을 위해 가격 구간별로 보조금 지원기준을 차등화 한다"고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6천만 원 미만 전액 지원, 6~9천만 원 미만 50% 지원, 9천만 원 이상 미지원" 이라고 하죠.

 

2021년 2월 현재 6천만 원이 넘는 가격표가 붙은 전기차는 수입차 뿐입니다. 하지만 6천만 원 미만 가격의 수입차도 있으니 이것은 수입차에 대한 장벽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겠습니다. 전기차 보조금은 어디까지나 전기차의 '보급을 확대'하기 위한 목적이므로, 더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가격대의 전기차 구매를 보조해 주는게 목적에 맞겠죠.

 

오늘 포스팅의 제목을 '고가(高價) 전기차에 대한 단상'이라고 적어봤는데, 고가의 - 즉 비싼 전기차는 뭐가 있을까요? 

처음부터 비쌌던 전기차로 Tesla Model S, X가 떠오르고, 기존 자동차 메이커에서 최근에 투입한 차들은 재규어 I-Pace, 벤츠 EQC, 아우디 e-tron 포르쉐 Taycan 정도가 떠오릅니다. 이 차들은 모두 가격이 1억 원이 넘는 고가 차량들 입니다.

 

참고로 우리나라는 프리미엄 독일차가 경제규모 대비 압도적으로 많이 팔리는 나라 입니다. S클래스나 E클래스는 본국인 독일 보다도 더 많이 판매된다는 기사를 잊을만 하면 한 번씩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브랜드에 걸맞는 가격의 전기차들도 잘 팔리고 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기존 프리미엄 자동차 메이커들의 전기차 판매는 최소한 우리나라에서는 죽을 쑤고 있고, 테슬라 마저도 판매량의 절대 대부분은 모델3 입니다. (2020년 테슬라 판매 1만2천여 대 중 모델3 97%, 모델X 4%, 모델S 3%)

 

우리나라 최고 인기 수입차 브랜드 벤츠인데.. 이 차는 아마도 cloaking 기능이 있는 듯.

 

차를 조금 아는 사람들에게 이 주제를 꺼내면 '그 돈이면 선택지가 너무 많다'는 말을 먼저 꺼냅니다. 하지만 선택의 문제는 선택의 문제일 뿐입니다. 실제로 1억 초반 가격대의 기존 엔진차와 전기차들을 비교해서 타보면 차 자체는 전기차쪽이 분명히 좋습니다.

"충전소가 부족한데 누가 사겠어?" 라고도 합니다. 엄밀히는 충전소 개수가 부족하지는 않습니다. 전기차를 '아직' 안 타고 다니니까 눈에 잘 안띄는 것 뿐이죠. 전기차를 며칠이라도 타보면 주로 다니는 경로의 충전소는 미리 파악을 하게 되더라고요.

 

생각해보면 지금까지의 전기차 오너들은 제가 보기엔 크게 두 부류였던 것 같습니다.

1. 경제성을 꼼꼼히 따진다: 다른 무엇보다도 경제성을 우선시하는 부류 (보조금, 각종 관련 세금 감면 내지 할인, 충전요금 할인, 톨비 할인 등)

2. 얼리어답터 성향이 매우 강하다: 가격이 얼마가 됐든 간에 남들이 아직 접해보지 못한 신기술이라면 환장하는 부류 (자율주행기술, 차량 OTA 업데이트 등)

 

1번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이리저리 따져본 후 마음에 드는 전기차를 일찍부터 구매해서 그야말로 뽕을 뽑고 있는 사람들이고, 2번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테슬라가 진출 하자마자 가격에 개의치 않고 모델S를 샀던 사람들이라 생각합니다. 

 

Moore의 idea diffusion curve

 

무어(Moore)의 유명한 '아이디어 확산 곡선'에 따르면,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를 초기에 받아들이는 그룹은 비록 그것이 아주 완벽하지 않더라도 그것에 열광하며 적극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지금의 전기차 오너들이 느낌상으로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 것 같아요.

 

https://en.m.wikipedia.org/wiki/Diffusion_of_innovations

 

느낌을 넘어서 수치로 한번 확인해 보았습니다. 블룸버그에 의하면 2020년 전세계에 굴러다니는 자동차 중 전기차와 플러그인하이브리드차의 비율은 0.7%에 불과합니다. 신차 판매에서의 비중도 3% 정도에 지나지 않고요. 즉, 위 커브를 기준으로 보자면 전세계 신차 구매자들 중 전기차 구매자들은 여전히 early majority는 커녕 이제야 innovator에서 early adopters로 넘어가는 단계에 와 있습니다. 

 

전기차가 기존 내연기관차와 가장 크게 다른점은 역시 연료보급 방식 입니다. 전기차는 전원을 연결해서 고전압 배터리를 충전시켜줘야하고, 내연기관차는 주유소에서 연료탱크에 가솔린/디젤을 채워줍니다. 전기차 충전은 '급속'이라는 이름이 붙은 충전기에서도 배터리를 80%까지 채우는데 30여분 정도가 걸리지만 내연기관차 주유는 1분 남짓이면 빈 통을 가득 채울 수 있습니다. 대신 전기차는 가정이나 일터에서 완속(AC) 충전기를 이용하여 잠자는 시간이나 근무하는 시간에 미리 충전을 해두면 따로 주유소를 가지 않아도 되지요. 그 외에도 여러가지 세세한 차이점들이 있지만 이용자에게 있어서 가장 큰 차이점은 역시 충전 vs 주유 입니다.

 

이렇게 멋진 주유소스러운 충전소는 현재 전국에 한 곳 뿐이죠.. 현대 EV스테이션 강동.

 

전기차 이용에서 가장 불편한 점으로 충전을 꼽는 사람들에게 제가 가장 자주 말씀드리던 부분이 바로 '핸드폰처럼 쓰시면 됩니다' 였습니다. 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잠 잘 때나 일터에 있을 때 주차장에 가만히 서있는 차를 충전하면 굳이 주유소에 갈 필요조차 사라지니 오히려 더 편하다는 논리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한 수입차 지점장님과 업무상 통화를 하다가 '충전이 주유보다 특별히 불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편한 점도있어요' 라는 이런 논리가 기존 고가 차량 고객들이 '고가 전기차' 구매 후 가장 불편을 느끼는 포인트라는 점을 새로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1억 원이 훌쩍 넘는 차량을 구매하는 고객들이 평소 차를 어떤식으로 이용하는지 잘 알지않느냐"

"xxx를 운전하시는 싸장님/싸모님들은 창문만 빠꼼히 열고 고급유 가득~을 외치시는 분들인데, 이 분들이 충전속도가 아무리 빠른들 차에서 내려서 케이블 땡기고 차에다 꽂아놓고 충전 기다리고 이런게 가능하실 것 같냐"

"고속도로 운전하다가 중간에 충전해야해서 휴게소에 갔는데 다른 전기차 충전중이라 꼼짝없이 기다려야 하는 그런 상황을 이 분들이 견딜 수 있을 것 같냐"

"나도 궁금해서 우리 시승차를 직접 타보면서 충전도해봤는데, 이 추운 겨울에 야외 급속충전소에서 차 케이블 꽂다가 눈밭에 구두까지 빠지고 너무 고생스러웠다, 우리 고객들은 어땠을 것 같냐"

"완속 충전 다 하셨으면 차 빼주세요 라는 연락 받으면 무슨 생각을 하겠냐"

 

이제와서 저도 생각해보니,

전기차를 충전소에 와서 창문 빠꼼 내리고 "고급전기 가득~"을 외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전기차 충전소는 다 셀프이고요, 모든 전기차 충전소는 모든 차에게 평등합니다.  

한겨울에 눈보라가 몰아쳐도 케이블이랑 커넥터를 내가 직접 꽂아야하는데, 운나쁘면 고장일 수도 있습니다.

 

2억 원 짜리 전기차를 타고 고속도로 충전소에 도착한들 대체로 비어있는 "고급전기 충전기"가 있을리가 없습니다.

제 아무리 비싼 요지의 신축 아파트에 산다 한들, 전기차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보급이 늘어나면서 아파트 공용 충전기에도 충전 매너가 필요해지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집에서 편히 쉬다가도 '차를 빼주러' 가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걸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같은 1억 얼마짜리 차를 굴리더라도, 전기차를 타가지고는 그런 '소소한 우월감'을 전혀 느낄 수가 없게 됩니다. 평소에도 셀프주유소만 이용하고, 주유건에 남은 마지막 기름 한 방울도 아까워서 탈탈 털어넣는 그런 서민인 제가 그런걸 느껴봤을리가 없죠. 

 

글을 작성하는 내내 냉정하게 계속 생각을 해봤는데, 기존에도 이미 고급/고가의 차량을 타던 사람들의 관점에서 볼 때 동가격대의 전기차로 갈아타야 하는 합리적인 이유나 감성적인 이유를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미국이나 유럽처럼 자기 차고가 있는 집에서 매일 충전을 할 수 있다면 나쁘지 않겠습니다. 회사 주차장에 충전 시설이 있는 경우도 괜찮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저의 최종 결론은, 최소한 우리나라에서는 고가 전기차는 보조금과 관계없이 앞으로도 당분간 쭉 쉽지 않을 것 같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