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하면 '가나다라마바사'를 떠올리고, 영어! 하면 'ABCDEFG'를 떠올립니다.
그런데, '가나다'는 자음 'ㄱㄴㄷ'과 모음 'ㅏ'가 결합된 형태이고, 'ABC'는 자음과 모음이 뒤섞여 있지요.
우리 한글의 모음은 써져있는 그대로 읽으면 됩니다. 'ㅏ'는 '아'라고 읽고, 'ㅐ'는 '애'라고 읽습니다.
이와 달리 영어의 모음에는 A, E, I, O, U가 있는데, 이것은 어떤 위치에서 무엇과 조합되어 있느냐에 따라 다르게 읽어야 합니다.
A 하나만 봐도, 이름은 분명 '에이'인데, cat에서는 '애'에 가까운 소리가 나고, cake에선 '에이'에 가깝게 읽어야 하며, far에서는 '아'에 가깝게 읽어야 합니다. 쉬운 단어들의 나열이라 너무 당연하게 여기실 수 있으나, 그렇게 읽지 않으면 의사소통이 불가능합니다.
E는 어떤가요? 이름은 '이'라는데, ten에서는 '에'에 가까운 소리가, teen에서는 '이'에 가까운 소리가, time에서는 그 소리를 아예 잃어버리기까지 합니다. 심지어 Peter에서는 '이'에 가까운 소리와 '어'에 가까운 소리가 다 들어있습니다.
왜 그런 일이 발생하는 걸까요? 좀 배우신 분이라면 단모음, 장모음, 이중모음에 대해서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미 그렇게 배우신 분들도 많으실테고요. 저희 큰 아이도 영어 배우는 것을 보니 요즘은 옛날처럼 무식(?)하게 ABC 외우고 '하우아유 마이네임이즈 블라블라블라'를 읊는게 아니라 Phonics(파닉스)부터 차근히 배워나가더군요.
외국계 직장생활을 십수년간 하면서 40대가 되어서야 얻은 깨달음들이 있어서 이렇게 글로 적고 있습니다만, 저같은 경우 지금까지 살면서 단모음, 장모음, 이중모음, 그리고 외워야 하는 예외들에 대해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에피소드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도 어떻게 읽는지 잘 모르는 단어가 불쑥 나타나면 잠시 사전을 찾아 발음기호를 확인하곤 합니다.
Episode 1. 'Jason Hoffman'
외국어고등학교 시절, 1학년 입학 후 전공어 및 영어 원어민 외국인 선생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지금이야 유치원에도 원어민 선생님들이 오신다지만, 90년대 중반에 중고생들이 외국인과 이름을 불러가며 대화할 일이 사실상 거의 없지요. 아마도 첫 영어 수업시간이었던 것 같은데, 반 친구 중 하나가 선생님의 이름을 부르며 질문을 했습니다.
"Jason, are you 블라블라블라???"
그런데 그 친구는 선생님의 이름을 이렇게 발음했습니다.
...
..... (좀 더)
....... (좀 더 아래로)
Jason [자손]
선생님은 분명 자기 이름을 '제이슨'이라고 소개 했는데, 아마 그 친구는 그것을 순간 까먹었던 모양입니다. 모두는 웃음보가 터졌고, 같이 수업을 들었던 친구끼리는 졸업할 때까지 그 선생님을 '자손 호프만'이라고 불렀습니다.
Episode 2. 'Finale'
KATUSA로 군복무 시절에 있었던 이야기 입니다. 저는 아파치 헬리콥터 부대에서 근무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운 좋게도) 라인 중대에 배치가 되어 중대원의 절반은 조종사인 장교들, 나머지 절반은 정비사인 부사관 및 사병들, 그리고 KATUSA는 저 하나였습니다.
미군 부사관과 사병들은 일과시간엔 항상 헬기를 정비하느라 사무실 자체가 격납고에 있었고, 저는 주로 중대 본부에서 장교들 및 우리 군으로 치면 행보관에 해당하는 1st Sergeant과 일과를 보냈습니다. 장교들이 전부 조종사이다 보니, 지금 생각해보면 특이한 군 경력을 가진 인원들이 꽤 있었습니다.
이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당시 CW2 계급이었던 해병 군악대에서 트럼펫 연주자 출신의 조종사입니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중대 본부는 대체로 한가한데, 그 조종사가 KATUSA인 저의 도움을 받기 위해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취미 얘기로 대화 주제가 넘어갔습니다. 저도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하고 피아노도 꽤 오래 쳤었기에 음악 이야기를 하다가 어찌어찌 하여 클래식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블라블라,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를 연주하거나 들을 때면 피날레가 너무 좋아" 뭐 이런 문장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아주 막 유창하지는 않지만 신나게 영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이 대목에서 갑자기 그 조종사가 얼굴을 찡그리며 "어느 부분이라고?" 라고 영어로 되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내가 f발음을 너무 못했나' 싶어서 'fㅣ날-레' 라고 다시 말해봅니다. 유난히 뾰족한 코에 날렵한 턱선을 가졌던 그 백인 조종사 아저씨의 표정은 미궁에 빠진 채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 머릿속에서 만들어볼 수 있는 모든 단모음/장모음/이중모음의 지식을 동원하여, 'fㅣ네일', 'fㅏ이날레', 'fㅏ이내일' 등등 상상력을 동원한 온갖 발음을 만들어내 보았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대화는 통하지 않았고... 급기야 저는 종이에 finale를 써서 조종사에게 건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의 표정이 급 매우 환하게 밝아지며 이렇게 외칩니다.
...
..... (좀 더)
....... (좀 더 아래로)
"Ah~!! Fㅣ낼--리!!!" [fɪˈnæli]
이 날 저는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관심 분야에 대해서 영어로 이야기하고 싶다면 그 분야와 관련된 단어의 발음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Episode 3. 'Sedan'
저는 자동차를 참 좋아합니다. 이 블로그의 포스팅들을 쭉 살펴보셨다면 차에 대한 포스팅이 간간이 등장하는 것을 보셨을겁니다. 이번 에피소드도 군 복무시절의 이야기인데, 음악은 제가 한 방 먹었지만, 자동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미국 본토에서 우리 부대로 새로 배치받은 정비사인 Specialist(계급으로는 우리 상병에 해당.. 경력 2년 이상)와 부대 적응에 대해서 이것저것 하는데, 자기는 차를 너무 좋아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자기 트럭이 어쩌고, 스포츠카가 어쩌고, 쿠페니 컨버터블이니 한참을 떠들어대더니 저한테 "한국에선 어떤 차가 인기있니?"를 물었습니다. 저는 "응 너희 나라에서는 땅덩이가 넓어서 픽업트럭이 인기 있겠지만 우리나라는 좀 달라, 우리는 Sedan[쎄단]을 제일 좋아하고 쏘나타가 잘 팔려" 라고 친절히 답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친구가, "What? 그게 뭔데? 어떤 스타일?" 막 이럽니다. 그래서 다시 또박또박 "노노, 쎄-단-" 이라 해도 못 알아듣더군요. 그래서 이번엔 설명을 해봅니다. "야야, 포 도어에 트렁크가 뒤에 있고 블라블라" 라고 설명을 하며 손짓으로 그림을 그려보았습니다.
그제서야 그 친구의 표정이 급 환하게 밝아지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
..... (좀 더)
....... (좀 더 아래로)
"Ah~!! 써대--앤!!" [səˈdæn]
술술 써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글로 쓰기 어려운 내용이네요. 어차피 저는 영어 전공자도 아니고, 이 글을 통해서 독자께 영어를 막 가르쳐드리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제가 과거에 몸소 겪었던 에피소드를 통해서 '혀를 굴리는게 문제가 아니라 정확한 모음 발음이 영어 의사소통에서 정말 중요하겠구나' 라는 포인트를 전달해보고 싶었습니다. 다음에는 좀 더 잘 읽히는 문장과 써먹을 만한 '꺼리'를 들고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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